내가 만난 사람들

성안길 터줏대감1 공원당-반백년 시민 곁을 지켜 온 맛집

작은지기 2012. 1. 11. 11:33

 

반백년 시민 곁을 지켜 온 맛집

대물림전통음식계승업소 ‘공원당’

 

                 김정수․조원상 모자의 ‘맛 이야기’

 

 

 

  어린 시절 아빠 손을 잡고 갔던 공원당. 빵 맛이 어찌나 좋은지 속으로 ‘우리 아빠는 여길 어떻게 알았지? 혼자서만 맛있는 이 집을 오셨던 모양이야.’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50년. 공원당이 청주시민들의 가슴에 이름을 새긴 지 딱 50년이다. 반백년인 셈이다. 1961년, 필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공원당이 생겼다.

 

 

 

“처음엔 지금 있는 청송통닭 자리에 가게를 얻었어. 15평 남짓 되는 가게에서 빵을 만들어 팔았지. 그 때 내 나이가 스물한 살이었어. 제빵사 남편을 만나서 빵장사를 하게 된 거지.”

꽃다운 20대 시절을 추억하는 김정수(70) 할머니. 사람들은 할아버지, 그러니까 김 할머니의 남편보다 할머니를 더 많이 알고 있다. 공원당을 찾아 온 손님들을 직접 맞는 역할은 항상 할머니 몫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할머니의 장남 조원상(47)씨가 그 자리를 맡고 있다. 그래서 공원당은 충청북도가 지정한 ‘대물림전통음식계승업소’이다.

 

 “그땐 빵만 팔았어.”

다시 50년을 거슬러 올라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1년 후에 지금 이 자리로 이사한 거야. 가게를 옮기면서 우동이랑 짜장면도 만들었어. 짜장 한 그릇에 15원 했어. 그때 중앙공원 근처엔 시민관도 있고, 청주극장, 현대극장이 있었지.”

모든 게 귀했던 60년 대. 배고픈 사람들도 많고, 거지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깡패, 건달들도 많았어. 하루는 이 사람들이 음식을 시켜먹고 내가 주방에 우동을 말러 간 사이에 도망 간 거야. 한 두 번이 아니고 계속 그러는 거야. 나중에 부아가 나서 쫓아갔지. 배는 고픈데 돈이 없다고 말하면 그냥 줬을 텐데, 비겁하게 도망 가냐고 혼을 냈지. 그 후엔 나중에 갚겠다면서 얻어먹고 가곤 했지. 그네들이 지금은 50, 60대 쯤 됐을 거야.”

할머니의 기막힌 사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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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립병원이 근처에 있었어. 몇 만원 어치나 빵을 주문한거야, 병원에서. 그래서 빵을 만들어 가면 누군가 빵만 받아선 도망가는 거야. 병원에 물어보면 주문한 적이 없다고 하고. 몇 번을 당했어. 가게가 한창 번창할 때는 제빵기술자들이 비싼 재료들을 몰래 빼돌려서 골탕을 먹이는 거야. 이런 저런 사연을 말하려면 끝도 없어.”

 

공원당 빵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뜨끈뜨끈한 빵은 멀리 시골에서 올라 온 상인들과 여행객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데 최고였다.

할아버지만의 특별한 비법에서 나오는 우동 맛은 지금도 잊지 않고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남편이 좀 고집스러워야지. 재료 하나하나 모두 자기 손으로 골라야 하고, 나쁜 것은 절대로 안 써. 싼 것도 안 쓰고. 우리 집 음식은 모두 천연재료로 만든 양념만 쓰지, 인스턴트는 찾아볼 수 없어. 멸치 한 마리도 최고 제품이 아니면 안 쓰니……. 이 걸 다 배우려면 오죽 힘들겠어.”

 

몇 년 전부터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있는 장남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 2002년 가업을 잇기로 결심하고 하던 사업을 접고 이젠 공원당의 작은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조원상씨.

한 숨을 그러잡던 김 할머니는 아들에게 말을 넘긴다.

 

 

“파리바게뜨니 크라운베이커리니 하는 빵 브랜드들이 각종 홍보를 하면서 제빵시장에 뛰어들어 기존에 있던 제빵점들이 어려울 때였어요. 전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고요. 그 때 서울에선 돈까스가 유행했어요. 아직 청주엔 레스토랑 돈까스는 있어도 서울에서처럼 프랜차이즈 제품이 없을 때였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벤치마킹을 했죠.”

이때부터 공원당에 빵 대신에 돈까스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여름엔 공원당 별미인 메밀국수가 인기를 끌었다.

“참 희한하게 돈까스와 우동이 궁합이 잘 맞아요. 그래서 성공했죠. 얄팍한 돈까스만 보다가 1센티미터 이상의 고기 두께를 가진 돈까스에 사람들이 반했죠.”

 

처음엔 부모님을 도와드릴 목적으로 겸업을 했는데 나중엔 다른 사람에게 사업을 넘기고 본격적으로 가업을 잇기로 했다.

까다롭고 고집스런 아버지의 비법을 배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때론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고 한다.

“테이블에 양념으로 올려놓은 고춧가루도 모두 비싼 국산 고춧가루예요. 손님들이 고춧가루를 많이 타 놓고 그냥 버리는 것을 보면 아깝죠.”

‘부모 명예에 먹칠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훈계는 장남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 말씀을 따라왔기에 지금까지 공원당의 맛이 변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을 수 있었다.

 

 

“주말에 고향(청주)에 내려왔다가 저희 집을 들르는 손님들이 많아요. 예전 맛 그대로라며 좋아하시는 분들을 볼 때 기분 좋죠.”

“어제도 20년 만에 온 손님이 ‘그 때 맛이 난다’고 말해. 그런 한마디가 흐뭇하지.”

잠깐 김 할머니가 말을 섞는다.

 

“경영철학? 그런 건 몰라. 음식으로 사람들 안속이고 열심히 살아온 게 다야. 사람이 먹는 먹을거리에 진실해야지.”

“주인인 제가 저희 집 우동은 매일 먹어도 안 질려요. 그게 지금의 공원당을 있게 하지 않았을까요?”

이심전심인 모자의 웃음이 밝다.

“이젠 우리 아들이 잘해내겠지. 기대하고 있어.”

부모님의 기대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텐데 장남은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결심을 꺼내놓는다.

 

 

“유산을 물려받은 게 아니라 명예를 물려받은 거지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명예. 제가 앞으로 30년은 이끌어 가야 할 텐데 어깨가 무겁죠. 지난 50년을 여러분 곁을 지킨 것처럼 앞으로도 청주시민들의 살아있는 추억이 되고 싶어요.”

 

“반백년을 해 왔잖아. 고집 없으면 못해.” 김 할머니의 말이 ‘공원당’을 청주의 랜드마크로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아들의 소망에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 글: 정예훈, 사진:구연길